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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어금니, 주삿바늘이 되다!

2018년 대학 실험실에서 창업한 기업이 일을 냈어요. 이듬해 독사의 어금니에 착안한 기술로 주삿바늘 없이 피부에 약물을 주입하는 패치를 개발했어요. 세계 유명 과학저널에 소개됐고, 전 세계 바이오업계를 놀라게 했어요. 그로부터 2년 후 이곳은 논문 속 원천기술을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해외 진출 채비를 서두르고 있어요.

 

배랩은 최근 마이크로 피내 주사기 양산에 성공했다. 올해 하반기 양산 규모를 10배 이상 늘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 상태이다. 사진은 마이크로 주사기를 들고 있는 배원규 숭실대 전기공학부 교수다.

 

2019년 7월 어느 날, 세계 3대 과학저널 중 하나인 미국 사이언스지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혹시 백신이나 유효 약물이 전달되는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있나? 있다면 보내달라. 유효 데이터에 문제가 없다면 사이언스지보다 당장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기술을 담는 사이언스 트랜스레이션메디슨(사이언스 중개의학) 표지에 실어주겠다.”

전화를 받은 배원규(40) 배랩 대표는 곧바로 관련 데이터를 보냈고, 같은 해 8월 1일 배 대표의 논문이 표지에 실린 저널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당시 숭실대 전기공학부 교수를 겸하고 있던 배 대표와 정훈의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 공동 연구진은 “독사의 어금니에 착안한 기술로 주삿바늘과 실린더 없이 파스처럼 피부에 붙이기만 하면 약물이 저절로 스며드는 마이크로니들(미세바늘) 액상약물전달패치를 발명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주삿바늘의 독주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주사기는 1853년 프랑스 외과의사 샤를 가브리엘 프라바즈가 피스톤과 속이 빈 바늘이 달린 도구를 발명한 데서 시작됐다. 프라바즈도 주사기 아이디어를 독사의 어금니에서 얻었다고 알려져 있고, 실린더 주사기는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인 약물 전달의 수단이다.

배 대표는 프라바즈가 영감을 얻은 독사와 완전히 다른, 어금니 독니가 목구멍에 근처에 달린 유혈목이에 착안해 ‘패치’ 원리를 발견했다. 유혈목이는 어금니에 아주 미세한 홈이 있어 무는 순간 먹이의 피부 표면에 홈을 만들고 모세관 현상으로 별도의 압력 없이 몇 초 만에 독물을 침투시켰다.

 

연구팀은 반도체 공정을 응용해 어금니 구조 모사체 100여 개를 배열해 우표형 전달 패치를 만들었고, 실험용 설치류 살갗에 부착해 5초 만에 유효 약물이 전달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로써 주사의 고통과 두려움 없이 편리하게 접종·시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난 7월 12일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배 대표는 “자연의 생태나 생물들의 신체 구조를 모사하거나 영감을 받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자연 모사 공학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라며 “개발 초기에는 치매 치료제나 당뇨 환자용 인슐린 등 고분자 약물만 생각했는데, 지난 4월 마이크로 피내 주사기도 개발했다. 미백 성분이나 주름 개선 성분 주입에 탁월해 보톡스, 필러, PDRN 연어 DNA 등 시술 목적의 피내 주사기도 대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명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은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다. 실제 배 대표의 스승이었던 고(故) 서갑양 서울대 기계항공공학과 교수가 세계적인 자연 모사 공학자였다. 2012년에도 서 교수 연구진이 딱정벌레의 날개를 모방해 일반 벨크로(velcro, 일명 ‘찍찍이’)보다 접착력이 3배 강력한 접합 장치를 개발해 재료 분야 국제학술지인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즈(Advanced Materials) 2012년 1월호 표지 논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독사 어금니 연구도 당시 서 교수 연구팀에 있었던 배 대표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연구해온 과제 중 하나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이제 배 대표가 이끄는 배랩은 교수 창업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실제 배랩은 서울시가 공공·대학·민간이 협력해 청년창업을 육성하고 지역 상생발전을 유도한다는 목표로 2017년부터 추진해온 캠퍼스타운 사업의 주축 중 하나로 소개된다. 이보다 앞서 배랩의 마이크로 주사기는 ‘2019년 언론이 주목한 10대 기초연구 지원성과’에 선정된 바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다. 최근 미국식품의약국(FDA),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백신연구소(IVI),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등 세계 유수 기관이 백신, 의약품을 고통 없이 주입하는 신개념 약물 전달 시스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특히 산업화가 빠른 피부미용 분야에서 마이크로 피내 주사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배 대표의 발걸음도 한층 더 빨라졌다. 그는 “대학의 원천기술이 상용화돼 시장에 나오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논문을 발표한 지 1년 반 만에 기술이 적용된 양산형 주사기에 기대가 큰 이유”라고도 말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3차원 독사 어금니 구조의 마이크로니들. / 사진:배랩

 

경쟁사 마이크로니들의 경우 임상 과정을 진행하던데, 어떻게 벌써 양산형을 내놨나.

좀 다른 얘기다. 기존 마이크로니들이 대중화가 느린 까닭이기도 하다. 경쟁사 마이크로니들은 하이드로젤 형태로 만들어진 약물이 피부에 들어가 녹는 원리라 약물을 이들 몸체와 섞어야 하는 공정이 필요하다. 당연히 모든 응용 분야 약물마다 임상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배랩의 마이크로니들은 임상 자체가 필요 없다. 알레르기를 유발하지 않는 의료용 아크릴로 0.25㎜짜리 바늘을 만들어 혈관을 건드리지 않고 약물만 주입한다. 약물이 들어 있지 않은 마이크로니들의 경우 사실상 의료기기가 아니라 의료용 가위나 칼 같은 공산품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경쟁사는 약물을 몸체와 섞는 방식을 고수한다.

마이크로니들은 오래된 기술이다. 학계 입장에서는 약물을 몸체에 녹이는 방식이 더 흥미롭다. 약물마다 새로운 연구 데이터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늘 몸체에 약물을 탑재해야만 의약품이 되는 기술이다 보니 기존 약물을 가진 제약사와 협업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임상을 마친 백신 등 대부분의 약물이 액체 형태인 것을 고려해 더 쉽게 전달하는 방식을 찾는 데 집중했다.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도 관심 있어 한다고 들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사기가 무분별하게 재사용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에서 성 접촉 못지않게 수혈, 약물주사, 마약주사 등에 흔히 사용되는 주사기의 상태가 불결해 에이즈 감염을 초래한 사례가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배랩은 한 번 쓰면 바늘이 구부러져 쓸 수 없는 일회용 주사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공산품이라면 모방할 우려는 없나.

따라 해도 되지만,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다. 3차원 마이크로 구조물(바늘, 스피큘 등)은 반도체 공정기술로 기존 주사기를 그대로 수백 배 작게 만든 정밀공학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미 상당수 화장품 업체에 우리 기술이 소문이 나 마이크로 스피큘(미세침)만 재가공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배랩이 출시한 재생크림(화장품)도 같은 스피큘을 담고 있다. 이 화장품은 크림 속의 독사 어금니 스피큘이 피부에 박혀 미세한 틈을 만들고 그 틈으로 유효성분이 스며드는 원리다.

피부에 흡수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 인간은 ‘각질’이란 피부 보호막을 갖도록 진화했다. 우리가 무심코 때를 벗겨낸다며 각질을 무시하지만, 진드기 등 병충해, 바이러스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고가 화장품이 자랑하는 기능성 유효성분도 막아서 문제지만…. 인간의 피부는 바깥부터 크게 각질, 표피, 진피로 구성돼 있는데 진피까지 기능성 성분(각종 미백, 주름 개선 성분 등)이 침투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마이크로 스피큘은 진피까지 침투하나.

그렇다. 실제 데이터도 있다. 미국 사이언스지도 놀란 결과다. 숭실대에서 보유 중인 10억원짜리 고가 전자현미경을 통해 성분이 진피로 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침투량, 속도, 번진 정도, 면적까지 모두 계산된 데이터도 있다.

반도체 기술은 어떻게 활용했나.

여러 전공을 거치다 보니 이렇게 됐다.(웃음) 학부 때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의공학을 전공할 때 지도교수로 모신 분이 기계항공공학 박사였다. 이 분이 자연 모사 공학의 대가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피부 진단·치료 분야와 관련된 의학 연구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료기기 개발에 뛰어들었고, 멤스(MEMS, 미세전자기계시스템) 기술을 활용하게 됐다.

 

멤스는 반도체 공정기술을 기반으로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초소형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을 말한다. 요즘엔 의료·생명공학 분야에 응용되면서 ‘바이오 멤스’라 불리기도 한다. 전기공학부에서 맡은 세부 전공도 자연 모사 공학, 멤스, 바이오멤스 등 총 3개다.

다들 양산에서 골머리를 앓는데, 한층 쉬웠겠다.

반도체 공정을 연구한 경험이 있어 처음에는 양산 성공을 자신했다. 반도체 공정 중 일부만 적용하면 되는 일이라 크게 불량 날 일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첫 1만 개 양산에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뿔싸. 공장에 가보니 실제 금형 기계가 작동하는 리드타임이 생각보다 길어 금형 설계를 다시 해야만 했다.

 

현장 엔지니어의 조언을 듣고 곧바로 연구실에서 캐드 프로그램으로 설계를 바꿨다. 역시 현장을 무시하면 큰일 난다. 숱한 실패 끝에 2019년 10월 시작한 양산 테스트는 해를 넘겨 2020년 10월에서야 마무리됐다. 지금은 연간 10만 개 정도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에스테틱 분야에서 러브콜이 이어진다고 들었다.

당장 밝힐 수는 없지만, 국내외 코스메틱사와 바이오사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았다. 미국 연예계 유명 인사도 회사를 차려주겠다며 연락을 했다. 특히 국내 에스테틱 숍에서 연락이 끊이질 않는다. 왜 그런가 봤더니 사정이 있었다. 성형외과에서 얼굴에 있는 지방을 녹여 갸름한 얼굴 라인을 만들어주는 윤곽주사가 인기다. 성분은 화장품에 들어가는 기능성 재료인데, 주사기를 쓸 수밖에 없어 의사가 시술해야 한다.

 

현행법상 원료가 화장품이어도 주사기를 쓰면 의료행위이다. 주사기만 쓰지 않으면 병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스스로 손재주(?)가 없다고 인정하는 해외 의사들은 육각 스탬프형 마이크로니들을 선호한다. 피부에 갖다 누르기만 하면 적은 횟수로도 더 많은 유효성분을 피부 깊이 주입할 수 있다. 싱가포르나 유럽 등 해외 바이어는 아예 충전물을 빼고 주사기만 수출해달라고 성화다.

몰려드는 주문을 소화할 수 있나.

안 그래도 양산 규모를 대폭 키울 참이다. 대기업과 계약을 맺으려면 월 10만 개 이상은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 경북 구미에 있는 생산업체들과 손잡고 10만 개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체계를 꾸리고 있다. 프로세스 검증이 끝나면 생산량을 10배 이상 늘릴 계획이다. 수출을 용이하게 하려고 기존 스탬프에 들어갔던 금속 스프링도 실리콘으로 바꾸는 중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공산품 수출허가도 받아두었다. 내년부터 꽤 굵직굵직한 계약도 성사될 거다.

다른 교수 창업 사례보다 사업화가 빠른 것 같다.

대학가에서 연구개발만 해놓고 사업화가 요원한 경우가 많다. 배랩도 장기적으로 다양한 제약회사와 제휴를 맺어 수년 내에 인슐린, 도네페질과 같은 치료 목적뿐만 아니라 결핵(BCG) 예방주사와 같은 경피용 백신을 자가 접종할 수 있는 주사기를 만들고 싶다. 의료 시설이 부족한 제3세계 국가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돈을 벌어 버텨야 한다. 배랩에서 샴푸, 화장품, 각종 에스테틱 용품을 내놓고, 직접 라이브쇼핑에도 출연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2013년 갑자기 스승이 유명을 달리했을 때 충격이 컸다. 의공학 전공자가 자연 모사 공학 분야 박사과정을 밟겠다고 지도교수로 나서달라고 부탁했을 때 멋쩍게 웃었던 그. 수년간 연구실에서 수많은 국제 논문을 출판하고 ‘MIT에서 선정한 젊은 과학자 100인’에 선정됐던 그였지만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냈던 큰 과학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꾸준함과 성실함을 강조했다. 그때 내가 배웠던 열정을 무기로 내 제자들, 아니 임직원들과 함께 배랩을 이끌고 있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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