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영인 왕타오(汪滔)는 젊다. 영어권에서 ‘프랭크 왕’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1980년생이니 올해 38세다. 세계 최대의 드론 생산업체인 DJI의 창업주이자 대표이사(CEO)다. DJI는 영어로 ‘다장 이노베이션스 사이언스 앤드 테크놀로지(Dà-Jiāng Innovations Science and Technology Co., Ltd)’로 불리며 중국어는 ‘다장촹신커지요시엔공스(大疆创新科技有限公司)’다.
테크 분야 웹진인 테크와이어아시아에 따르면 DJI는 2017년 기준 137억 달러의 시장 가치를 인정받았다. 미국 포브스로부터 367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은 마윈(馬雲, 54)의 알리바바나 360억 달러를 인정받은 마화텅(馬化謄, 47)의 텐센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드론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DJI는 ‘드론 업계의 애플’, 왕타오는 ‘드론 분야의 스티브 잡스’로 불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2015년 DJI가 전 세계 민간 드론 산업의 최정상에 있다고 평가했다.
아시아 최연소의 테크분야 억만장자
‘세계 최대’라는 말로는 이 업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DJI는 2017년 전 세계 레크리에이션 드론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한 압도적인 주도업체다. 이에 힘입어 중국은 2017년 전 세계 상업 드론 시장의 94%를 차지했다. 일반인이 구입할 수 있는 드론 10대 중 7대는 DJI 제품이며, 9대는 ‘메이드 인 차이나’다. 드론은 중국이 개발과 생산을 모두 주도하는 최초의 업종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중국의 미래 산업에 대한 자신감까지 실어줬다는 평가다. 이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가 드론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드론은 DJI와 중국의 아이템으로 더욱 확고히 입지를 굳히고 있다.
왕타오 개인의 재산도 엄청나다. 미국 포브스는 지난해 8월 테크 부문 부자 순위를 발표하면서 왕타오의 재산을 32억 달러로 평가하고 이 부문 세계 76위에 올렸다. 게다가 왕타오는 테크 부문 부자 중에서 10번째로 젊다. 최연소는 시간이 지나면 내용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메신저 서비스인 스냅챗 공동 창업자인 에반 스피겔(27, 32억 달러, 76위)이 차지했고 같은 기업 공동창업자인 바비 머피(29, 32억 달러, 76위)와 헬스케어 업체인 아웃캄헬스의 공동창업자인 리시 샤(32, 36억 달러 69위)가 뒤를 이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33, 696억 달러, 3위)와 저커버그의 하버드대 기숙사 룸메이트로서 창업을 도왔던 더스틴 모스코비츠(33,133억 달러, 19위), 그의 하버드 클래스메이트로 공동창업자인 에두아르도 세버린(35, 97억 달러, 27위)이 각각 최연소 부문 4, 5, 7위에 올랐다. 에어비앤비를 공동 창업하고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는 네이선 블레차지크(34, 38억 달러, 65위), 최고경영자(CEO)인 브라이언 체스키(36, 38억 달러, 65위), 최고정보책임자(CIO)인 조 게비아(36, 38억 달러, 65위)가 각각 6, 8, 9위에 올랐다.
1~9위가 모두 정보기술(IT) 중심의 서비스 업종에서 나왔으며 국적이 브라질인 세버린을 제외하곤 모두 미국인이다. 당시 37세였던 왕타오는 32억 달러의 재산으로 포브스 테크 부문 세계 76위, 최연소 부문 10위에 올랐다. 그는 제조업 분야, 비IT 분야에선 세계 1위인 셈이다. 테크와이어아시아는 지난해 8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왕타오를 아시아 테크 분야에서 최연소 억만장자라고 발표했다.
왕 대표는 1980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알리바바그룹 창업자인 마윈(馬雲, 54)과 동향이다. 그의 어머니는 교사,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왕 대표의 부모는 중국에서 개혁개방과 경제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직업을 바꿔 개인사업에 뛰어들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경제특구로 지정된 개혁개방 정책의 중심지인 광둥성(廣東省) 선전(深圳)으로 이주해 장사를 하다가 중소기업체를 창업해 운영했다.
▎선전 DJI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드론 시연을 관람하는 방문객들.
모형 헬기에 빠졌던 아이
문제는 부모가 사업을 하느라 아들을 돌볼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는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고향인 항저우로 보내져 교사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중국에선 이처럼 부모가 돈을 벌려고 대도시로 떠나면서 고향에 맡겨진 자식을 ‘유수아동(留守兒童)’이라고 하며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 경제개발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다. 돈을 벌기 위해 광둥성이나 한국 등으로 거주지를 옮긴 수많은 중국인은 자식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몇 년 뒤 훌쩍 커버린 아이를 만나면 서먹서먹하기 일쑤였다.
지난 1월 추위 속에서 등교하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모습이 사진으로 찍힌 중국 윈난성(雲南省) 자오퉁(沼通)시의 8살 소년 왕푸만(王福滿)이 바로 유수아동이다. 이 사진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유수아동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왕타오는 무난하게 지내면서 고향 항저우에서 소학교에 이어 초급중학교(중학교)와 고급중학교(고교)를 마쳤다. 부모의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했다. 바로 모형 헬기였다. 소학생 시절 헬리콥터에 관한 만화책을 읽은 그는 하늘을 나는 헬기와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 우연히 모형 헬기를 파는 것을 보고 부모를 졸랐지만 가격이 너무도 비쌌다.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의 7배 정도였다고 한다. 경제력이 있었던 그의 부모는 성적을 높이면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왕타오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모형 헬기를 얻기 위해 공부에 열중해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집념인지도 모른다. 집요함은 기업인 왕타오를 만든 핵심 재료가 됐다.
이후 그는 모형 비행기와 관련된 책을 수없이 읽고 이를 만들어보는 일에 학업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는 부모와 떨어져 혼자 지내는 그가 심리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마쳤다.
왕타오는 중국의 대학입학시험인 가오카오(高考)를 치르고 상하이(上海)에 있는 명문 국립사범대학인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에 입학했다. 화둥사범대학은 중국 정부가 1959~90년에 실시했던 국가중점대학 중 하나였다. 국가중점대학은 정부가 교육과 연구에서 높은 수준을 인정하고 예산 배정 등에서 다른 대학보다 우선권을 부여한 대학이다. 1959년 베이징대, 칭화대 등 20개 대학으로 시작해 1978년 88개 대학까지 늘렸다.
하지만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의 커리큘럼은 왕타오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3학년을 마치자 화둥사범대학을 중퇴하고 전 세계의 다양한 명문대학에 입학 지원서를 보냈다. 그 결과 홍콩과기대학(香港科技大學, Hong Ko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HKUST)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 대학은 1991년에 설립된 과학기술 중심의 대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연구교육기관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권위 있는 대학 평가기관인 QS(Quacquarelli Symonds)는 이 대학을 2011~2013년 3년 연속 아시아 대학순위 1위에 올렸다. 세계 순위에서는 2012년 33위까지 올랐다.
왕타오는 2003년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옮겨 홍콩과 기대학 전자컴퓨터 공학부에서 공부했다. 왕타오의 입학은 대학에도 행운이었다. 왕타오는 홍콩과기대에서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면서 꿈에 날개를 달았다. 비로소 자신의 취미이자 특기인 항공과 대학 전공을 접목할 수 있었다. 로봇 분야도 연구하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그의 지도교수는 졸업 프로젝트로 원격제어 헬기의 비행제어시스템 연구를 제안했다. 이 대학은 드론 연구와 개발 지원금으로 1만8000홍콩달러(약 245만 원)를 지급했다. 왕타오는 이 대학 기숙사 방에서 창업을 구상하며 자신의 길을 열었다.
DJI 신화 만든 드론 ‘팬텀’
연구와 개발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을 얻은 왕타오는 본격적인 창업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로봇연구팀을 이끌고 2005년 홍콩 로봇 경진대회에 참가해 1등을 거머쥐었다. 여기서 받은 상금을 밑천으로 홍콩 옆에 있는 광둥성 선전에서 2006년 DJI를 창업했다. 시작은 작았지만 열정은 넘쳤다.
창업한 뒤 왕 대표는 사무실 자신의 책상 옆에 간이침대부터 설치했다. 입구에 ‘머리만 들어갈 것, 감정은 빼고’라고 붙여놓은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드론 개발에 몰두했다. 매주 80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보여줬던 집념과 집요함이 사업을 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즐기던 드론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창업 초기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소형 무인기 제작에 몰두했다. 꿈과 일이 일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왕 대표는 이를 이뤘다. 그는 드론 개발에 주력했다.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었다. 개발 작업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고 고뇌의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열정은 배신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형 헬기에 카메라를 연결하는 수준이었지만 2008년 마침내 프로펠러 4개가 달린, 제대로 된 드론을 출시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념은 기적을 만들었다. 2008년 그의 드론 사업은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달린 드론인 ‘팬텀(Phantom)’을 출시하면서다. 팬텀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시장을 매료시켰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누구나 쉽게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려서 직접 소형 헬기를 조종하며 소비자로서 수없이 실망해본 기억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나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드론’을 개발 목표로 잡았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은 별도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던 기존 드론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제품 개발에 적용하려고 애쓴 덕분이었다.
게다가 큰 통에 드론을 부분이나 부품별로 분해해 넣어 다니다 필요할 때 일일이 결합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기존 제품과 확실하게 차별화했다. 보관통에서 꺼내면 곧바로 드론을 날릴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일이 터지면 곧바로 드론을 날려야 하는 미디어 분야에선 이상적인 드론 카메라였다.
게다가 그의 집요함과 집중은 드론 사업에서 미덕이 됐다. 그는 불과 5~6개월마다 신제품을 출시했다. 기존 업체에서 5~6년이 걸리는 것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DJI는 빠른 속도로 시장을 확대하고 드론 개발을 선도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창의성이 접목됐다. 디자인은 물론 특허를 등록한 신기술이 줄을 이었다. 이렇게 DJI는 드론 산업의 두뇌가 되어갔다.
이러한 왕타오 덕분에 중국산 제품은 ‘싸구려’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계의 공장’이던 중국이 세계 드론 시장 과점을 바탕으로 세계의 개발실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글로벌 드론 업계 최강자 DJI 덕분에 중국 스스로 세계 최고의 드론 기술 국가가 됐다. DJI의 성공에 고무된 젊은이들은 제각기 창의적인 기술을 들고 드론 업체 창업에 나섰다. 지난 2015년에만 400여 개가 창업했고, 자금도 활발하게 투입됐다. 지금까지 드론 업체들이 조달한 자금은 6억 달러를 넘어섰다.
중국의 드론 업체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친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각자 필살기를 보유하고 있다. 베이징 업체 파워비전은 수심 30m까지 잠수해 최대 4시간 동안 수중 촬영을 할 수 있는 방수 레저 드론을 개발했다. 상하이의 이랜뷰는 가로 6㎝, 세로 9㎝ 크기에 무게가 60g에 지나지 않은 드론에 500만 화소 카메라를 장착한 제품을 출시했다. DJI의 성공을 계기로 중국 전체의 드론 시장에 규모의 경제학을 이룬 셈이다.
드론 업계에서 기술이 축적되면서 시너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드론 개발과 디자인, 생산 업체는 물론 부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업체까지 연결되는 일관적인 드론 개발과 생산 시스템이 중국에 정착했다. DJI로 대표되는 선발 업체들이 두뇌 역할을 하며 업계를 끌어주고, 조립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업체들이 이를 따라가며 뒤에서 밀어주는 형국이다. 이로써 스스로 진화하는 드론 산업의 생태계가 중국에 정착됐다.
유수아동이던 왕타오가 드론 산업은 물론 중국의 미래 산업을 이끌 인물로 주목받는 이유다. 그는 여전히 젊다. 앞으로 중국을 넘어 아시아의 혁신을 이끌 미래 세대 경영인으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